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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프랑스의 후기인상파 화가/ 폴 고갱

by 햇님이 마미 2012.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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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63일의 (…) 항해 끝에 우리들은 (1891년)6월 8일 밤바다 저 너머로 번개 같이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기이한 불빛을 목격하게 되었다. 63일간 우리들은 견디기 어려운 기다림과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설레임을 느껴 왔다. 그리고 지금 어두컴컴한 하늘에 톱니 모양의 검은 원추형 산 그림자가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배는 무레아를 돌아 타히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마흔세 번째 생일에서 하루가 지난 뒤, 폴 고갱은 마침내 파페에테라는 이름의 항구에 내렸다. 하지만 사람이 북적이는 식민지의 작은 항구는 그가 생각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더럽혀지지 않은 자연, 문명의 해악이 도달하지 못한 원시의 모습을 찾아 먼 곳까지 기껏 달려왔는데, 그런 순수의 풍경은 이곳에서도 점차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아직 과거의 모습이 남아있는 섬의 한 모퉁이에 정착한 그는 오두막에 살면서 타히티인 여자를 애인 겸 모델로 삼는다. 그의 직업은 화가였다.

 

 

 

하지만 그는 이국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타히티는 작품의 소재를 얻을 곳, 영감과 쾌락을 제공할 곳이었지 결코 그가 평생 거주하다가 뼈를 묻을 곳은 아니었다. 몇 달이 지나자 그는 고독과 향수를 느낀다. 돈은 떨어진 지 오래였다. 결국 그는 고국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1893년 6월 4일에 다시 배에 오른다. 2년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타히티에 머무르며 그는 독특하고 과감한 색채가 돋보이는 60여점의 회화와 조각 작품을 만들었다. 다만 그 작품들이 진정한 걸작으로 추앙되는 것은 그의 생전이 아니라 사후의 일이 될 것이었다.

 

 

외젠 앙리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진보 성향의 언론인이었던 부친 클로비스 고갱은 보수 성향의 나폴레옹 3세가 권력을 장악하자 신변 위협을 느끼고 가족을 이끌고 해외로 떠난다. 목적지는 아내의 친척이 있는 남아메리카 페루였지만, 클로비스는 항해 도중에 갑작스레 사망한다. 어린 남매를 데리고 페루에 도착한 미망인 알린 고갱은 1849년부터 1854년까지 지역 유지인 외삼촌의 도움으로 살아가다가 고국으로 돌아와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한다.

 

 

 

폴 고갱의 방랑벽이 처음 드러난 것은 17세 때인 1865년에 선원으로 일하면서부터였다. 1872년에 파리로 돌아온 그는 어머니 친구인 금융가 구스타브 아로자의 주선으로 어느 증권중개인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다. 미술 애호가였던 아로자는 고갱에게 생계수단뿐만 아니라 화가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점차 명성을 얻고 있었고,  미술품 수집가에서 아마추어 화가로 변신한 고갱은 인상주의 운동의 대부로 손꼽히는 카미유 피사로와 에드가 드가의 인정을 받으며 1876년에 처음으로 전시회에 작품을 내놓는다. 

 

1882년에 증권업계를 떠난 고갱은 전업 화가가 되려고 하지만, 그의 가족은 물론이고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화가들도 크게 놀라며 반대했다. 1873년에 덴마크 출신의 메테 가트와 결혼해서 이미 자녀가 다섯이나 되는 가장으로서 고갱의 판단은 지나치게 성급한 데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덴마크로 건너갔지만, 고갱은 가족과의 생이별에도 굴하지 않고 여전히 파리와 브르타뉴 등지를 오가며 화가로서의 경력을 추구했다. 결국 타히티로 떠나기 직전인 1891년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10여 년 넘도록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다.

 

 

처음에는 고갱 역시 피사로의 조언을 따라 인상주의의 기법을 시도했지만, 이후 도자예술에 심취하고 일본미술과 접하는 등의 색다른 경험을 통해 점차 독특한 화풍을 정립한다. 자기만의 특별한 소재를 발견하고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문명사회를 떠날 생각을 품은 것도 이때부터였다. 1887년, 그는 지인의 소개로 운하 건설이 한창인 파나마로 떠나지만, 대신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에서 6개월쯤 머물다가 병든 몸으로 귀국한다.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자신의 이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두 사람을 만난다. 바로 신인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이며 화상인 테오 반 고흐였다. 

 

 

 

빈센트는 화가로서나 친구로서나 고갱을 매우 신뢰했고, 테오 역시 고갱의 진가를 최초로 깨달은 화상 가운데 하나였다. 1888년, 브르타뉴에 머물던 고갱은 테오의 제안으로 아를에 머물던 빈센트와 합류한다.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하고 개성적인 두 거장의 짧은 동거는 2개월 만인 12월 23일 밤, 악명 높은 빈센트 반 고흐의 ‘귀 절단 사건’이 벌어지면서 갑작스럽게 끝나 버린다. 일각에서는 빈센트를 적극적으로 돌보지 않은 고갱에게 비극의 책임을 돌렸으며, 훗날 빈센트의 명성이 더 올라갈수록 여론은 고갱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브르타뉴로 돌아간 고갱은 <황색의 그리스도>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완성한다. 여러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이름도 알려졌고 추종자도 생겼지만, 평판은 여전히 엇갈리기만 했고 성공은 아직 요원하기만 했다. 에펠탑의 개장으로 유명한 1889년의 파리 만국박람회 당시, 고갱은 식민지의 민속을 소개한 전시회를 보고 다시 한번 문명사회를 탈출하려 시도한다. 1891년 4월, 고갱은 어렵게 후원금을 얻어 타히티로 향하지만,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고독과 향수를 이기지 못하고 2년 만인 1893년 여름에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타히티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했다. 반 고흐 형제를 비롯해 그의 친구와 후원자들이 상당수 사망했고, 미술계의 유행도 이미 바뀌었다. 귀국한 해에 첫 번째 개인전을 열어 타히티 시절의 그림을 선보이지만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흑인 혼혈 여성 안나 라 자바네즈를 모델 겸 애인으로 삼아 새로운 창작욕에 불타지만, 우발적인 폭력 사건에 휘말려 골절상을 입고 몇 개월간 병상에 누워 있는 사이 둘의 관계는 파탄으로 끝나버린다. 연이은 좌절을 겪은 고갱은 프랑스를 영영 뜨기로 작정한다. 다시 타히티로 가려는 것이었다.

 

 

 

떠나기 직전 어느 기자와의 대담에서, 고갱은 자신이 타히티로 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목가적인 섬과 원초적이며 순박한 주민에게 매료당했기 때문이지요.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려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을 이루려면 근원으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해요. 나의 이브는 동물에 가깝습니다. 벌거벗었는데도 음란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래서예요. (...) 떠나기 전에 샤를 모리스의 도움을 얻어 타히티 생활을 소개한 책을 펴낼 생각입니다.” 그 책의 제목이 뭐냐고 묻자 고갱은 이렇게 대답한다. “노아노아. 타히티 말로 ‘향기’라는 뜻이지요.”

 

1895년 6월에 파리를 떠난 고갱은 9월 초에 다시 타히티의 파페에테에 도착한다. 하지만 골절상의 후유증은 물론이고 젊은 시절에 완치되지 못한 매독의 재발로 그의 몸은 이미 크게 망가진 다음이었다. 고갱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심지어 자살까지도 시도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붓을 놓지는 않았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으로는 새로 얻은 애인 파우라를 모델로 한 여러 점의 작품과 최후의 대작인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가 있다.

 

 

고갱의 말년은 조용한 은둔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계를 위해 그 지역의 신문에 발표한 논설에는 중국인 이민자들을 향한 인종차별적인 독설이 가득했다. 원시의 순수함을 동경하던 고갱이었지만, 식민지의 백인으로서의 고정관념을 떨치기는 어려웠던 까닭이다. 1901년, 고갱은 타히티를 떠나 거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문명화된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 섬으로 거처를 옮기지만, 식민지의 백인 관료와 선교사의 전횡을 목도하고 이를 고발하여 법정 다툼을 벌이다 패소하고 만다. 이후 건강 악화로 한 달 넘게 병상에 누워 있던 고갱은 1903년 5월 8일에 마침내 사망한다.

 

 

 

데이비드 스위트먼은 고갱이 대중적인 성공보다도 동료 화가들의 인정을 바랐지만 평생 그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수집가 출신의 배부른 아마추어 화가 정도로 치부했던 것이다. 작품 자체보다도 극적인 생애 때문에 오히려 더 주목 받는 반 고흐와 마찬가지로, 고갱 역시 작품 자체보다도 오히려 타히티에서 사망한 은둔 예술가라는 전설이 널리 퍼지면서 대중의 관심을 끈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고갱의 그림에 나타난 강렬한 색채와 자유로운 형태는 인상주의를 탈피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훗날 야수파와 표현주의, 그리고 추상예술의 대두에 선구 역할을 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갱이 사망한 지 1년 뒤인 1904년, 파리에 온 어느 젊은 영국인 작가는 최근에 타히티에서 사망한 프랑스인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을 느낀다. 그의 일생이 흥미로운 소재라고 생각한 영국인은 13년 뒤인 1917년에 타히티를 직접 방문해 고갱의 흔적을 찾아 다닌다. 그 와중에 그는 고갱이 제1차 타히티 체류 시 머물렀던 오두막의 문짝에 그려놓은 그림을 찾아내 헐값에 구입해 영국으로 가져온다. 이 영국인 작가 서머싯 몸은 소설 <달과 6펜스>(1921) 발표와 함께 큰 성공을 거두었고, 문명을 떠나 자연으로 돌아갔다는 고갱의 전설을 확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타히티 방문에서 몸이 거둔 성과는 소설뿐만이 아니었다. 단돈 400프랑을 주고 산 고갱의 문짝 그림이 반세기 뒤인 1962년에는 1만 7천 달러로 가격이 껑충 치솟았기 때문이다. 말년의 고갱은 돈이 없어서 자신이 그린 그림을 먹을 것과 맞바꾸곤 했는데, 마을의 중국인 식품점 주인은 그렇게 해서 얻은 고갱의 데생을 주로 ‘포장지’로 사용했다. 타히티의 백인들 중에는 고갱이 그려준 초상화를 못마땅해 해서 다락에 처박아놓았다가 훗날 화상에게 처분하거나, 또는 고갱의 그림 선물을 아예 거절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로선 고갱의 사후에 그 그림의 가치가 얼마나 막대하게 치솟을지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건 아마 고갱 자신도 몰랐으리라.

 

 

고갱의 전기로는 우선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에 포함된 프랑수아즈 카생의 <고갱(고귀한 야만인)>(이희재 옮김, 1996)이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사진 및 도판 자료를 담고 있어서 추천할 만하다. 보다 상세한 전기로는 데이비드 스위트먼의 <고갱: 타히티의 관능>(한기찬 옮김, 한길아트, 2003)이 있는데, 특히 고갱 당대의 사회 및 미술계의 상황 등을 자세히 설명하는 한편, 치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고갱에 관한 기존의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본문의 내용은 이 두 권의 책을 주로 참고했다.

고갱(고귀한 야만인)노아노아(폴 고갱의 타히티 체류기)반 고흐vs폴 고갱

 

고갱의 저서로는 우선 타히티 시절의 기록인 <노아노아(폴 고갱의 타히티 체류기)>(유준상 옮김, 열화당, 1979; 1994)가 있다. 똑같은 책이 <고갱의 타히티 기행>(남진현 옮김, 서해문집, 1999)라는 번역본으로도 나와 있는데, 여기에는 고갱의 스케치와 서머싯 몸의 서문도 수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고갱의 저서라고 나와 있는 몇 권의 번역서는 그가 남긴 에세이와 편지를 그의 그림과 함께 엮은 것들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최경혜 옮김, 가람기획, 1999)는 고갱의 에세이와 극작가 스트린드베리의 유명한 ‘서문 거절 답장’ 등을 수록했다. <야만인의 절규>(강주헌 옮김, 창해, 2000)는 고갱의 에세이와 편지를 수록했다.

 

고흐와 고갱의 만남에 관해서는 브래들리 콜린스의 <반 고흐 vs 폴 고갱>(이은희 옮김, 다빈치, 2002)에 자세히 나와 있다. 미술사가 존 리월드의 역작 <인상주의의 역사>와 <후기인상주의의 역사>(정진국 옮김, 까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프랑스 미술계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풍부한 도판을 곁들인 책이다. 고흐와 고갱의 활동은 이 가운데 두 번째 책에서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송무 옮김, 세계문학전집 38, 민음사. 2000)는 고갱의 전설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긴 했지만, 몇 가지 유사점을 빼면 그 내용은 고갱의 실제 삶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아직도 ‘고갱’이라고 하면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팽개치고 화가가 되어 남태평양으로 떠난 금융인” 정도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달과 6펜스>의 작중인물 찰스 스트릭랜드의 이야기이지 실존인물 폴 고갱의 이야기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처 : 리니지2 KINGS
글쓴이 : 대마법사카프 원글보기
메모 : 좋은 자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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