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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수업참고자료/미술이론

민화

by 햇님이 마미 2010. 12. 14.

민화에 대한 설명중 나름 쉽게 잘 되어있다.

 

민화란 장르는 보면 볼수록 매력이 있다. 지금 현대인의 입맛에도 맞으며 수업시간에 활용도도 높을 뿐더러

그림에 소질 없는 학생들까지 결과물에 만족감을 줄수 있는 그림인것 같다.

 

민화부채만들기 등 다양한 생활 미술품속에 적용가능하다.

일반적으로 민화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2)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1929년 3월 일본 교토에서 열린 민예품전람회에서 '민속적 회화'라는 의미로 '민화'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1937년 2월 일본의 월간 <공예>지에 기고 한 '공예적 회화'라는 글에서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을 민화라고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민화라는 용어로 부른 것은 일본 민속화의 일종인 오오쓰에, 도로에, 에마를 지칭한 것이고 야나기 무네요시가 민화란 용어를 쓰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민화에 대한 개념은 있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여염집의 병풍, 족자 또는 벽에 붙어있는 그림을 속화(俗畵)라고 칭했다. 보통 민화는 "한 사회에서 생활 습속에 따라 제작된 대중적인 실용화"라 정의한다. 학문적으로 표현하자면 "민족의 신앙, 소원, 일상 생활과 정치, 사회의 질서유지를 목적으로 한 교화, 주거공간의 미화를 위한 장식, 민중의 미의식에 직결되는 작품"을 민화라 통칭하고 있다.

 우리 회화사의 주류에서 벗어난 비전문적인 화공, 장인들이 대중의 그림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멋대로 그린 소박하고, 꾸밈없는, 그리 명성이 알려지지 않은 그림을 가리킨다. 보다 광범위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통용된 민화의 개념은 정통화 대가들의 작품을 제외한 도화서, 불교, 도교 등의 장식과 종교, 민족에 관계된 그림들도 포함하도 있다.

 민화의 특성은 일반 서민들이 공감하는 실용성, 상징성, 예술성에 있다. 또한 토착종교와 결합된 풍습에 주술적인 의미가 부여된 것들이 많다. 주로 상징적 표현으로 무병장수, 부귀공명, 다산, 벽사구복과 같은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착이 반영된다.

 우리나라에서는 20세기 전후,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그림들이 우리 국민들과 구미인, 일본인 등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면서 '민화' 혹은 '민족화', '겨레그림'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민화에 대한 정의나 민화관은 크게 민화의 제작과 사용의 범주, 즉 누가 그렸고 누가 사용했으며 어떤 목적으로 그렸는가 하는 문제와 예술적 가치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민화는 상류계층의 감상용 그림이 못 된다고 해서 회화사의 일반적인 범주에서 제외되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례였다. 일단 민화라고 불리면 정통회화와는 구별되는 회화라는 인식을 갖게된다. 그러나 이렇게 민화를 일반적인 회화의 범주에서 제외시키게 되면 민화가 가진 예술적 의미나 역사적 의미는 크게 퇴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민화는 단지 소박하고 꾸밈없는 민중의 그림'이라는 단편적인 정의에서 벗어나 민화의 형성과정이나 유통과정 그리고 내용을 형성하게 된 당시의 미의식과 전체 미술사적 맥락을 폭넓게 해석하고 이해해야만 할 때이다.

민화의 목적

 한국의 민화는 쓰임새와 상징이 있는 그림이다. 일반적으로 생활의 자질구레한 물품들에 장식적으로 그려지거나 가옥구조에 첨가되는 장식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민화는 병풍으로 편집되어 쓰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병풍에 그린 민화는 그것을 둘러칠 장소나 행사의 내용에 걸맞은 것이 선택되었다. 이것은 곧 민화에 부여되어 있는 상징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금박판(저고리나 치마같은 곳에 금박을 올리는 데 사용하던 판)이나 나무에 수(壽), 복(福), 다산(多産)등의 글자들이나 길상을 새겼다.

˹ûû<SPAN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0.000pt;color:"#000000";line-height:10.000pt;letter-spacing:0.000pt;text-align:center;'> 한국의 민화는 쓰임새와 상징이 있는 그림이다. 일반적으로 생활의 자질구레한 물품들에 장식적으로 그려지거나 가옥구조에 첨가되는 장식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많다

 이러한 민화의 상징적 표현은 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희노애락과 그것을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세계관을 보여주게 된다. 곧, 민화에는 무병장수, 부귀공명, 다산, 벽사구복 등 인간으로서의 소박한 바램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민화가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동경의 대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병장수 (無病長壽)


 현세를 살고 있는 인간들의 가장 큰 소망은 아마도,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일 것이다.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수 있을 것이라는, 불로장생의 믿음은, 참으로 오래되고도 끝이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소망인 듯 하다.

 장수의 상징으로는 해, 구름,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 천도 등이 있는데, 옛사람들은 이것들을, 시문, 그림, 조각, 생활용품 등에 즐겨 사용하였다.

 우리의 민화에서도 이러한 무병장수, 불로장생에 대한 소망을 깃들여 이 열가지 장생물을 한 화면에 배치하여 십장생도라 이름 붙여 세화로 그리기도 하고 회갑잔치를 장식하는 수연병풍으로 쓰기도 하였다.다산 (多産)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는 노동력의 다소가 곧 부의 원천이었던 이유에 다산을 큰 미덕으로 삼았다. 게다가 남아선호의 사상이 가세하여 아이를 많이 낳고, 또 그 중에서도 아들을 많이 낳아 잘 살게 해 달라는 소망을 품게 되는 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한 바램 이었다. 이러한 다산의 상징으로는 연꽃이나, 수십마리의 물고기가 떼를 지어 노니는 어해도, 알을 품은 잉어 그림 등이 있다.

부귀공명 (富貴公明)


 과거에 나가 급제하고, 벼슬을 하여 이름을 떨치며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없는 풍요로운 생활을 현세에 누리는 최대의 영화로 생각하였고 항상 현세의 행복을 추구하였던 민화의 주인들은 이러한 부귀공명을 소망하는 마음을 여러가지 그림에 실어 담아놓았다

 예를 들어, 꽃 중의 왕으로 일컬어 지는 모란은 그 자태의 화려함으로 인해 부귀를 의미하는 대표적인 상징이며, 물고기그림 중에서 잉어나 쏘가리 등이 공명과 관련한 상징들이다. 어변성룡도는 잉어가 변하여 용이된다고 하여, 대표적인 입신출세를 소망하는 민화의 화제이다.벽사구복(僻邪求福)

 민화는 또한 악귀를 쫓는 주술적인 성격을 품고 있기도 했다. 재앙과 액운과 나쁜 병을 물리쳐 늘 행복하고 평온한 생활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러한 소망의 또 한 행태인 부적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서 맥을 잇고 있다. 또 입춘에 이르면 '입춘대길' 등의 길상문을 대문 앞에 붙여서 액을 쫓고 복을 비는 마음과도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벽사의 그림은 정월 초하루에 선물하던 세화가 있으며, 민화의 가장 보편적인 소재인 호랑이 그림이 옛사람들의 이러한 벽사구복의 마음을 담은 민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민화의 발달

 조선후기(약 1700년 이후)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다양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 회화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은 사상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변화였다. 조선시대는 성리학과 실학의 발달로 주체적인 자존의식과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고가 크게 중시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시켰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회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화원(畵員)과 문인(文人)들은 기존의 중국 산수에서 벗어나 조선의 실재 경관을 대상으로 하는 진경산수화를 발달시켰으며, 곧이어 일반 서민들의 생활상을 표현한 풍속화가 순수감상화의 차원으로까지 발전해갔다.

 조선후기 이전까지 회화의 수요층은 주로 사대부와 문인들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농업 생산력과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은 회화의 제작 수요층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기존의 양반층 이외에 중인(中人)계층이 경제적으로 부상해 갔으며 서민들 중에서도 농업과 상공업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서구의 부르주아지처럼 근대사회의 주체로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다만 자신들의 재력 정도에 따라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나아갔으며 그에 따라 회화의 수요도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순수감상용 회화보다 장식용 그림을 통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연초(年初)에 집안에 붙였던 진경산수화를 비롯하여 요지연도, 문자도, 책거리, 화조도 같은 화려하고 섬세한 장식 그림들이 사대부가에서부터 일반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발달해갔다. 한양의 광통교(현재 광교 부근)에서는 이들의 매매가 이루어졌으며, 19세기 문헌에는 '일반 서민들이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림을 집에 붙인다'는 사실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이렇듯 저변으로 확산되어간 장식 그림들은 일반 서민들의 의식과 정서를 반영하는 새로운 시각적 통로가 되었다. 또한 사대부가의 장식 그림이 지니고 있던 전형들이 파괴되고 보다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일반 서민들의 미적 취향이 반영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민화란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민간으로 확산되어 갔던 장식 그림으로 일반 서민들의 의식과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그림을 가리킨다. 민화는 서로 상반되는 두가지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나는 미숙한 기량이나 끊임없는 모방의 습성으로 인한 '작품의 질적 저하'이며, 다른 하나는 다양한 변형을 통한 '새로운 형식의 창출'이다. 전자는 회화의 수요가 저변화될 때 발생하는 보편적인 현상이고, 후자는 봉건사회의 해체기라는 조선후기의 사회가 지닌 시대적 특수성이다. 민화의 특징은 이 두가지 성격의 충돌과 결합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우리는 민화의 보편적 성격에 지나치게 치중해온 경향이 있다. 소박함이나 꾸밈없음 같은 미적 평가들은 모두 민화의 보편적 속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보편성과 함께 민화가 지닌 특수성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중국, 혹은 조선시대의 사대부가에서 향유되던 장식 그림의 전형이 민화에서 과감하게 변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낡고 고정된 형식은 새로운 형식으로 전이되었고, 사대부나 문인들의 고사(故事)가 담겨있던 그림 속으로 민간 설화나 민간 신앙에 관련된 내용들이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왜곡과 과장, 삽입과 생략에 의한 자유로운 형식 변형을 통해 민화는 당대 일반 서민들의 의식과 정서를 과감히 표현해 냈던 것이다. 민화가 조선후기 회화사에서 진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민화는 그 종류가 다양할 뿐 아니라 단 한 점도 똑같은 작품이 없다. 이것은 그만큼 창조성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뜻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 그림들이 근대적인 대량 생산의 공정 속으로 편입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민화는 다양하기는 하지만 체계적으로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민화는 쇠퇴해 갔고 그 성과들은 중앙 화단으로 재수용 되거나 근대사회의 대중 문화로 연결되지 못하고 단절되고 말았다. 당대의 사대부와 문인들은 이 그림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에 결코 미적으로 공감하지 않았다. 또한 민화의 담당자들 역시 민화의 발달을 체계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봉건적 모순에 도전하는 수많은 민란(民亂)이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근대화가 외세의 입김 속에서 위로부터의 개혁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민화의 발전에도 치명적인 걸림돌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화는 조선 후기 봉건사회 해체기에 성장해가던 민(民)의 문화적 대응력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그 안에 깃들여진 밝고 해학적인 정서와 만나면서 그 시대에 회화의 양적 발달이 가져다 줄 수 있었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민화의 특징

표현적 특징


민화는 공간구성 방법이 독특하다

민화는 전후, 좌우, 상하, 고저에 대한 분명하고 일괄된 시점이나 작법을 무시하고 그렸다. 즉 시점이 다양하다. 가령 호랑이의 얼굴과 형태에서 앞면과 옆면이 동시에 표현되기도 하고 사물의 겉과 속이 동시에 그려지기도 한다.

복합성과 반복성이 두드러진다.

화의나 그림의 주제가 일치하는 것이면 관련된 도상들을 모두 하나의 화면에 묘사한다. 반복성은 주술적인 면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는데, 똑같은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일종의 심리적 만족감이나 의지를 보인다

민화는 모든 색채를 강렬한 색상대비로 표현하고 있다.

민화는 어둡고 칙칙한 색이 거의 없고 모든 사물이 밝고 명확하다. 사물 모두의 존재 가치를 동등하게 인정했기 때문에 붉은색 옆에 파란색을 똑같은 채도로 칠하여 어느 한 색이 다른 색으로 인해 약화되지 않도록 했다. 이러한 강렬한 색상대비는 민화의 멋이고 아름다움이다.



▶ 내용적 특징

민화는 장식적 필요에 의해서 그린 그림이다.

 민화는 거의가 병풍에 편집되어서 집 안에 간직되었는데 병풍에 그린 민화는 그것을 둘러칠 장소나 행사의 내용에 맞는 것이 선택되었고, 문배 그림이나 벽장식 그림에도 민화는 필수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신부가 타고 가는 꽃가마 덮게로도 이용되었다. 이렇듯 민화는 우리의 일상 생활공간 곳곳에 놓였으며 한국인이 살아가는 곳에는 민화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민화는 토속신앙과 세계관이 반영된 그림이다.

 민화에서 나타나는 상징성은 각 시대마다 그 때에 그려진 그림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상징성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상징성은 그 시대의 문화적 특성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민화의 상징적 표현은 서민들의 일상 생활에서 느끼는 희노애락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사소통의 바탕이 되는 공통의 세계관을 매개해 주는 역할도 해왔다.

민화는 주술적인 신앙이 반영된 그림이다.

 민화가 오늘날의 그림과 가장 다른 점은 그림이 일종의 주술적인 효과를 지닌 매개체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민화가 가진 주술적인 힘이 여러 가지 재앙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또 소원하는 바를 이루어 준다고 믿었다. 민화 중에는 토착적인 종교와 결합된 풍습에 의해 주술적인 의미가 부여된 것이 있는데 이를 세화(歲畵)라 하여 매우 널리 그려졌다.

민화는 집단적 감수성의 표현이다.

 

 정통회화가 작가 각자의 개성이나 세계관을 드러낸 것이라면 민화는 서민의 집단적인 미적 체험이나 세계관이 자연스럽고도 원초적인 표현형태로 드러난다. 민화는 서민의 공통적인 감수성을 공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민화는 모방 그림이다.

 

 민화는 그 주제와 표현의 원류에 있어서 문인화나 도화서 화공들의 그림을 철저하게 모방하고 있으면서도 담아 내는 내용이나 표현기법은 다르다. 민화는 일정한 본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가운데 점차 발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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